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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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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목차

1. 개요

2. 고대

그리스 이전 시기
미술적 형상을 통해서 현실적인 욕망을 기원 (ex.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또는 종교적인 의미가 강한 미술을 했다. (ex. 이집트 미술)
이집트의 벽화
그리스에 와서 예술은 독자적인 가치로서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 원근법이나 수학적 비례를 사용하여 조화와 안정을 추구
이집트 → 예술작품을 통해 신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성 등을 나타냄
그리스 → 신화적 존재 등을 이용해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 아름다움을 나타냄
특히 그리스의 미술 작품은 조각이나 건축에서 성과가 컸다. (ex.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제국 건설은 그리스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헬레니즘 문화
헬레니즘 문화 = ‘그리스 문화와 같은 문화’
헬레니즘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혼합되어있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교류와 융합을 거쳐 새로운 미술의 형태가 만들어 짐 (ex.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대제국의 문화는 후에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그리스인들의 우수한 문화를 바탕으로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로 확장되었다. (ex. 콜로세움)
고대미술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미의 대이론’이라 한다.

3. 중세

그리스로마 미술의 쇠퇴
중세 초기는 500여 년간 지속된 전쟁과 약탈의 정치적 혼란기였다.
그리스도교의 탄생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주인이었던 그리스·로마 문명에 원한을 가진 유대인의 원한의 도덕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주인들의 문화 즉,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특성은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술은 교리전달의 보조적 수단으로서만 인정하였다. (ex. 카타콤베 벽화)
카타콤베 벽화
당시 미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므로 당연히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작품의 대부분을 익명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로마네스크
11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그리스도교가 유럽 전역을 장악하자 거대한 교회 건축이 빈번해지고 이에 따라 건축술과 예술도 함께 발전하였다. 이 당시의 건축과 미술 양식을 로마네스크(’로마풍’ 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웅장한 교회 건축을 위해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도입하면서 로마네스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석조 건물로 건축 공법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건물이 높아지면 벽도 두꺼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창이 좁고 작아서 어둡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가장 높은 탑의 지붕이 둥글게 돔형을 이루는 특징을 가지며 이는 동방과의 잦은 전쟁의 영향으로 문화적으로 융합된 것이다.
로마네스크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이탈리아 피사 대성당이 있다.
이탈리아 피사 대성당
13C 부터 건축술의 발달로 이후 이백년간 고딕 양식이 유행하였다.
건물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과 골격에 대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벽 두께는 얇아지고 높고 아찔한 첨탑들이 들어섰다. → 건물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난다.
벽 두께가 얇아짐으로서 큰 창문을 낼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리에 장식을 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크고 화려해졌다. 즉, 로마네스크 때와는 반대로 화려하고 찬란한 느낌이 유행하였다.
파리의 샤르트르 대성당과 한국의 명동성당 등이 대표적인 고딕 양식이다.
파리의 샤르트르 대성당

4. 르네상스 미술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교회와 유일신에 대항하는 인간적 가치가 필요했던 부르주아들은 고대 사회로 관심을 돌렸고 고대 문화들을 재탐색 하는 분위기가 학계와 예술계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르네상스라고 한다. → 르네상스: ‘부활’, ‘다시 태어남’의 의미. 즉, 인간적 가치의 부활과 재생을 의미한다.
14~16세기의 르네상스는 과도기적 특성을 띤다.
종교적 측면에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크게 남아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가시적인 계급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르네상스 초기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은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체를 묘사하려고 노력했고 정확성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개별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진 반면에 그림 전체의 조화로운 구성에는 아직 소홀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주로 고대 신화에서 따온 경우가 많았다. (ex. <비너스의 탄생> by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르네상스 전성기
이성적 규칙을 통한 객관적인 정확성을 토대로 창작되었고 동시에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 그는 공기원근법 이론을 정립하였는데 이는 앞은 선명하고 뒤는 희미하게 그리는 기법이다. (ex. <모나리자>)
모나리자
이 시기의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미켈란젤로가 있다. 대표작으로는 <피에타>, <다비드 상> 등이 있다. 그는 그림도 그렸으나 이 역시도 풍경을 최소화하고 인물의 신체를 강조한 조각적인 면모를 강조하였다. (ex. <천지창조>)
피에타
천지창조
바로크로코코의 시대
17세기가 되면서 르네상스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규칙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상대적인 화풍이 등장하였다.
바로크
바로크는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단정하지 못하고 우아하지 않다는 경멸적인 뜻으로 붙여졌다.
바로크 양식의 특징은 유동적이고 강렬하며 장식적인 예술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카라바조는 바로크 미술의 아버지 격인데, 주위를 어둡게 하고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함으로써 정서적으로 강렬함을 남기는 기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ex.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바로크 미술은 루벤스에 이르러 정점에 다달았다. (ex.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이외에도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 미술가들로는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등이 있다.
로코코
18세기가 되면서 바로크의 감성적인 측면을 이어받지만 그 표현의 무게감과 강렬함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섬세하며 에로틱한 분위기의 로코코 양식이 등장하였다.
로코코 양식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예술가들은 부르주아들을 위한 그림을 그렸고 부르주아와 귀족의 주거 장식을 위해 아늑하고 감미로운 동시에 에로틱한 감성의 밝은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부셰가 있다. (ex. <비너스의 화장>)
비너스의 화장

5. 초기 근대 미술

신고전주의
로코코의 감성적이고 유약하며 여성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이 다시 예전의 고대 미술이나 르네상스의 이성적이고 강인하며 남성적인 모습으로의 회귀를 낳았다.
이러한 움직임 또는 양식을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로코코가 프랑스에서 유럽 전역으로의 유행이라면 신고전주의는 프랑스 퇴폐미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가의 주도 아래 다시 프랑스로 수용되어 절정을 맞이했다.
루이 16세는 프랑스 로코코의 향락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엄숙하고 계몽적이며 애국적인 분위기를 만드려고 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화가를 양성하였다.
프랑스 아카데미에서는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살롱전에 참가할 화가를 양성하였는데, 살롱전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작품은 주로 역사적인 장면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이에 따라 화가들은 주관과 감성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다비드 (ex. <소크라테스의 죽음>)와 그의 제자인 앵그르가 있다. (ex. <그랑 오달리스크>)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랑 오달리스크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엄숙하며 절대적인 측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탄생하였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신고전주의가 고대를 모방하고 재현하려고만 할 뿐, 개인의 감성과 주관의 탁월성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했다.
창작자의 주관과 표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림의 대상으로 하는 낭만주의 미술이 탄생하였다.
바로크 로코코와 비슷하게 감성을 중시하지만 반면에 화려하고 장식적인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화가의 강렬한 내면을 외부세계에 투영한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내면의 감성을 중시한다는 특징은 작가의 천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제리코 (ex. <메두사호의 뗏목>)와 들라크루아 (ex.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가 있다.
메두사호의 뗏목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6. 후기 근대 미술

사실주의(=리얼리즘)
낭만주의가 보여주는 극적이고 과장된 미적 양식에 대한 저항으로 사실주의(=리얼리즘)가 탄생하였다.
사실주의에서의 ‘사실’은 그릴 대상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의 ‘사실’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즉, 남루한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데에 집중하였다.
사실주의는 표현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띠게 되고 이로 인해 20세기가 되면서 공산주의 정치 이념을 대변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쿠르베 (ex. <오르낭의 매장>) 등이 있다.
오르낭의 매장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탄생하였다.
비현실적이고 과장적인 화풍을 거부하고 일상적인 삶과 자연을 그려내려 하였다.
다만 정치, 경제적 측면보단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려 하였다. 즉, 개념과 이념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려고 하였다.
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모네, 마네, 르누아르, 드가, 로댕 등이 있다. 이들은 같은 인상파지만 각자의 화풍과 표현 기법은 공통 분모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다채롭다.
모네의 「해돋이」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후기인상주의
전기인상주의를 거쳐 독자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서려고 노력한 화가집단을 후기 인상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는 고흐, 고갱, 세잔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세잔은 근대를 마무리하고 현대 미술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존 인상파 화가들이 순간적인 빛의 변화에 집중했던 것에 비해 세잔은 사물의 형태적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들에서 견고하고 영구적인 형태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즉, 순간의 인상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잔은 인상파와 결별한다. 왜냐하면 인상주의가 순간의 이미지를 그릴 때 전제하는 것은 화가의 단일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상파에서의 그림들은 1인칭의 세계, 즉 화가 중심의 세계이다.
반대로 세잔이 그리고자 한 것은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이다. 따라서 사물 중심의 세계이다. 세잔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구성적 측면에서의 사물의 형태이다. 이는 후에 현대 입체파와 추상미술을 탄생시켰다.
세잔의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7. 현대 미술

후기 인상주의 이후 20세기가 되면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미술 형식과 예술 철학들이 다채롭게 발생하였다.
고흐와 고갱의 원색적인 색채와 화가 내면의 강렬한 정신야수파독일의 표현주의로 발전하였다.
세잔의 사물의 형태적 본질에 집중하는 방식은 입체파(큐비즘)로 발전하였다.
이 밖에도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등 다양한 양식이 생겨났는데, 공통적으로 전통을 거부하고 실험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